[10분 세계사 흐름 잡기] 고대 로마 문명 (3) 라디푼디아와 내란의 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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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농업 경영 라티푼디아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 섬 등 다수의 속주를 손에 넣은 고대 로마이지만 전쟁에 의해 긴 세월에 걸친 번영에 흔들림이 생겼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100년 동안 전쟁을했지만 그 전쟁의 담당자는 중장 보병는 평민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농지를 경작하는 것이 본래의 직업 이었지만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지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황량했습니다.

다시 농지를 경작할 기력이 없는 농민들은 농지를 판매하여 생활비를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이 농민들이 내놓은 농지를 차례차례 매입 한 것이 귀족들입니다

귀족들은 농민들이 내놓은 농지를 대규모로 매입하여 대토지 소유주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입 한 광대 한 땅에서 노예를 이용하여 대규모 농업을 실시하게되었습니다. 

이 대토지 경영을 라티푼디움이라고합니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에 져 중소 농민들은 토지를 부축 당해 몰락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몰락한 중소 농민의 유민화

몰락한 중소 농민들은 농지에서의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모든 농사의 작품은 전쟁으로 거둔 다수의 노예가하는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중소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일단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음식에는 곤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부유한 나라입니다. 

속주 시칠리아 등에서 곡물은 다수 들어오기 때문에 빵도 만들고 마음껏 무료로 제공되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하지 않고 먹고 갈 수있는 농민들은 다음 엔터테인먼트를 구합니다. 

이것이 몰락 중소 농민의 유민 화입니다

따라서 고대 로마 극장 콜로세움에서 등이 발전했습니다.

도시로 향한 로마 시민들은 빵과 구경 거리를 요구하게되었다고 고대 로마의 시인은 풍자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로마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던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이탈리아 반도 외부에서 곡물을 수입하거나 지배 지역에서 징수하거나 노예를 다수 거느리고 농업을 시키거나 등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중소 농민들에 의해 구성된 중장 보병군입니다

그런 중소 농민들이 몰락하고 유민 화하고 전쟁에 참가할 수 없게되어 가면 이길 수있는 전쟁도 이길 수 없습니다.
국가 번영을 위해서도 중소 농민의 몰락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어선 것이 그라쿠스 형제 입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중소 농민들이 다시 자신들의 땅을 가진 자작농으로 번영해달라고 분투합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BC 133년 호민관이 라티푼디움에서 제 하에서 광대 한 토지를 가진 귀족에서 토지를 몰수하고 중소 농민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정책은 귀족 라티 훈 디아 의한 독점 벌이를 제한하는 정책 이었기 때문에, 그라 쿠스 형제는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 측에 죽고 시체를 강에 버려졌습니다

형의 생각을 계승 한 동생이 십년 후 다시 호민관으로 정책을 실행하려고 하지만 원로원 측이 반대하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는 자살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하고이 후 로마는 내란의  1세기에 들어갑니다.

 

마리우스가 바꾼 로마의 군제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의 중소 농민과 귀족 간의 경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은 실패로 끝났지만 여전히 로마 전체에 중장 보병의 구멍을 메우는 군사력의 확보라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 한 것이 평민파의 마리우스 입니다

그는 장군으로 활약 한 후 집정관 (콘술)로 몰락 한 중소 농민들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중장 보병 부족을 메웠습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무기를 다시 얻을 수있는 경제력을 억지로 주려고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런 우회하지 않고 직접 무기를 빌려 주었다

게다가 중소 농민들에게주는 무기는 거의 모든 마리우스의 사비로 충당되었다. 

장군 출신의 마리우스같은 직관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군제 개혁은 군사력 확대에 연결, 대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최하층의 불만이 폭발한 내란의 1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 후 BC 1세기 100 년을 내란의 1 세기라고합니다. 

로마의 번영의 기초를 구성하는 동맹시나 노예들 등 최하층의 인간들이 드디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BC 91 년 ~ BC 88년 동맹시 전쟁 이 일어났습니다

분할 통치의 최하층인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 도시가 마침내 불만을 폭발시켜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동맹시에도 시민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BC 73 년 ~ BC 71 년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콜로세움에서 살인을 당하고 있던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반란에서 10 만 명의 노예가 모이는 대규모 반란 이었지만 후에 삼두 정치의 두 명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진압시켜 수 있습니다

내란의 1 세기에 동맹시의 시민은 권리를 인정했지만 노예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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