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세계사 흐름 잡기]기독교 박해와 공인, 이슬람 발전의 역사
- 학업
- 2020. 4. 9.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와 공인의 역사
1세기 만에 신흥 종교 기독교에 로마의 하급 시민과 노예들은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고 그 중에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단 종교인 기독교를 싫어 로마 시민도 많아,그것을 받아 64 년 네로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또한 당시 로마 황제 숭배되어야 존재라는 황제 숭배 라는 생각이 주류 였기 때문에 그것에 따르지 않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강해집니다
그것을 받아 기독교인들은 지하 무덤에서 숨어 기독교의 하나님을 경배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3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을 극복하고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됩니다.
그러나 각자가 각각의 해석을 달리하면서기독교의 교리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니케아 공의회
그것을 받고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통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결정한 사건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파와 아타나시우스 파가 언쟁을 벌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타나시우스 파가 정통으로 결론, 아리우스파는 이단이라고 추방됩니다
기독교 교리의 확립
그리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화합니다.
하지만 불과 3년 후인 395 년에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어 버립니다.
다소 혼란이 일어나고 있지만 동서 교회가 주도하고 교리를 확립로 향하게합니다
431년의 위치는 동로마, 예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 파를 위해 에펜스 공의회 가 열렸지만 네스토리우스 파는 이단으로 되어 추방됩니다.
추방 된 네스토리우스 파가 동쪽으로 확산되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넘어 중국에 전해지면서 당나라 시대에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정통은 아타나시우스파가 되어 삼위일체설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성립 이야기 다음은 이슬람교의 성립 과정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이슬람교의 성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이슬람 최대의 성지는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입니다
7세기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랍인라는 셈족 아라비아 어족의 민족이 낙타와 양을 키우는 유목을하면서 교역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지역을 넘어 서기 힘들기 때문에 통상의 역할을했던 것이 아랍인 것입니다
하지만 6세기 후반 동서 교역 루트를 둘러싸고 지중해 연안의 비잔티움 제국과 이란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륙 통해 서양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와 서양을 잇는 새로운 노선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경유하는 길을 개척 된 길의 경유지로서 번창 한 것이 메카입니다.
무함마드와 이슬람교의 탄생
그런 아라비아 반도의 상인의 도시 메카에서 태어난 것이 무하마드입니다
그는 610년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점차 무하마드는 자신을 예언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언자로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선교해야한다고 생각한 무하마드는 행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당시 상인들로부터의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무하마드는 메카에서 포교의 한계를 느끼고 622 년 메카 북서부에 있는 메디나에 무슬림(이슬람교도)들과 함께 헤지라를 단행합니다.
그런데 메디나로 이동한 무하마드는 이슬람 신자를 폭발적으로 증가 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사람들이 연결되어있는 공동체를 움마라고 부르게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슬람교도 거대화하고 있고 점차 무하마드는 지도자로서 강력한 힘을 손에 넣어갔습니다.
그리고 630년에 마침내 과거 추방 된 메카에 성전( 지하드 )을 가해 정복에 성공합니다.
메카는 한때 이교도의 성지에서 카바 신전에는 많은 성상을 장식하고있었지만 모두 무하마드의 손으로 끊어갔습니다.
이슬람교의 특징
여기서 시험에 출제될만한 이슬람교의 특징에 대해 알아둡시다!
첫째, 알라는 유일신이며 무하마드의 가르침이 담긴 코란을 믿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이슬람교에서는 우상 숭배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러므로 성전은 일체의 동상도 장식되어 있지 않고 무하마드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옛날부터 금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에서는 아라베스크라는 구체적인 그림이 아니라 아름다운 모양으로 예술 표현하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이슬람은 정교 일치 의 원칙이 옛날부터 존재했습니다.
즉 이슬람 종교 지도자와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는 동일인이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고대 국가에 다수 보이는 정치 형태이지만 점차 종교와 정치 간의 대립이 일어나고 분리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이 정교 일치의 원칙이 원초적에서 있었습니다.
선거로 칼리프를 선택한 정톤 칼리프 시대
그런데 630 년에 메카를 정복 한 무하마드 이었지만, 681 년 무하마드는 죽습니다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어서 어쩔 수없이 신자 중에서 선거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선정 된 지도자를 칼리프 라고합니다.
칼리프와 예언자의 대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합법적인 선거로 칼리프가 선정되었습니다.
이 시대를 정통 칼리파 시대 (681 ~ 661 년)이라고합니다
초대 칼리프는 아부 바크르입니다.
2 대째, 3대 칼리프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전에 네하벤드 전투가 일어나고 이란 국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멸망했습니다.
그 거대한 제국이 멸망 한 것은 비잔틴 제국과의 오랜 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제국 사이에 싸움이 만들어낸 메카의 번영에 의한 이슬람 국가에 멸망이라니 아이러니합니다.
그리고 정통 칼리파 시대의 마지막 칼리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 가 취임합니다.
그가 칼리프에 취임했을 무렵 이슬람 지도권을 둘러싼 다툼은 강해졌고 그 중 한 명이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싸우는 것입니다.
무아위야는 메카의 대상인 우마이야 출신으로 정통 칼리파 시대의 3 대 우스만도 우마이야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3대째 우스만은 암살 되어 4 대째 알리가 칼리프에 취임했다.
같은 우마이야 출신의 무아위야에서 보면 알리의 칼리프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알리와 무아위야 사이의 싸움에 결착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알리가 암살 된 것으로 무아위야는 우마이야 왕조는 칼리프를 자칭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분열 수니파와 시아파
무아위야는 선거가 아니라 힘으로 칼리프(무하마드의 후계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통 칼리파 시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이슬람 충격이되어 이슬람은 크게 두 교파로 분열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입니다.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는 수니파가 다수, 90%, 시아파 소수, 1%로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시아파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란 같은 나라도 있습니다.
수니파는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 의한 칼리프 인정 교단 어디까지나 기존의 관행에 따라 이슬람 공동체를 유지하자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아파는 4대째 칼리프의 알리의 자손이야말로 정당한 지도자이며 알리의 혈통을 후손 이야말로 지도자에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수니파, 시아파의 싸움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뿌리 깊은 문제 때문에 제대로 확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이슬람 국가에서도 수니파인지 시아파인지는 중요한 문제로 나옵니다.